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문단 편집) ==== [[클라우디우스]] 가(家) ====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로마 역사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왕정과 공화정 이래로 로마 최고의 명문 중 하나였다. 사비니 출신 씨족으로 로마 건국 후 합류한 집단은 아니나, 공화정 초기부터 귀순하여 합류한 일족이다. 즉 이들의 역사는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길었다. 로마의 시작부터 함께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귀화한 사비니족 출신의 대표격으로 사비니, 움브리아, 오스카 지역 색이 강했고, 이런 특징을 가진 거물 정치인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로마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 인물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12표법을 제정한 정치인이다.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인레길렌시스 사비누스''' :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평민들에게 비난받게 된 원인을 제공한, 기원전 474년 10인 위원회의 리더이다. 그리스식의 폐쇄적 귀족 과두정을 주창했고, 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계급은 플레브스(평민)으로 마르켈루스 가의 중시조 혹은 일원으로 추정된 인물이다.]와 재판장에서 아름다운 평민 출신 미녀 베르기니아를 얻고자, 재판장에서 "베르기니아는 내가 노예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며 거짓증거를 내세웠다. 이때 베르기니아가 자결해,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질타를 받고 10인 위원회가 해산된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자신이 누명을 썼다고 포룸에서 연설하다가 체포됐다. 수감된 감옥에서 의문사했다.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 위에서 언급된 10인 위원장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10인 위원회 위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의 조카 혹은 손자뻘 친척이다. 친척 어른들인 두 사람 탄핵을 주도하고, 동명이인 아들과 함께 공공의 적이 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이미지 개선에 노력해 스스로를 눈치 없는 얼간이, 뚱보 등을 뜻한 크라수스로 가문명까지 바꿨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그의 아들은 베스타 여사제들과 원로원, 민회에게 재수없고 별자리상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모함받아 탄핵됐다. * ‘재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본명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위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의 손자이다. 카이쿠스는 말년 시력을 잃고 얻게 된 별명으로 장님을 뜻한다. 이 사람의 차남의 후손이 풀케르 가문이고, 4남의 후손이 네로 가문이다. 로마 수도와 가도의 개념을 처음 입안한 정치인으로 아흔의 나이에 [[피로스]]와 타협할 것을 고려하던 로마 정치인들을 호되게 꾸짖어 타협을 단념하게 만들었던 일화가 있다. 결국 로마는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에서 유일하게 [[한니발]]과 직접 맞붙어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장군 중 한 명으로 '로마의 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니발을 전담 마크하는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한니발을 끝까지 괴롭혔고, 이후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전사할 때까지 끈질기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그 외에 전쟁 도중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카르타고에 붙은 시라쿠사를 함락시킨 장군이기도 하다.[* 마르켈루스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일족의 평민 분파로,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 또는 그 후손이라는 추측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장님 아피우스(아피우스 카이쿠스)의 4남의 직계 후손으로 2차 포에니 전쟁 당시의 장군이었다. 전쟁 후반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기발한 전술로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격파했다. 포에니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이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전멸하고 하스드루발은 죽는다. 당시 로마 집정관이 자신의 임지를 이탈하는 것은 불법이었는데, 하스드루발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임지를 이탈해 하스드루발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출동했고, 이 결단이 로마군을 살려냈을 뿐 아니라 승리를 얻게 했다. 네로라는 말에는 ‘과감한 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그는 그의 이름에 맞게 행동했다. * '''클라우디아''': 로마 역사상 손꼽히는 망언으로 무려 25,000아세스라는 역대급 벌금을 물어서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여성형 이름인 클라우디아를 가진 여성으로 장님 아피우스의 딸이다. 클라우디아는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해군 제독이자 BC 249년도 집정관이며 장님 아피우스의 차남인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누나였다. 클라우디아는 BC 246년 극장에서 수많은 인파가 자기 앞을 가로막자, 당시 동생의 실수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드레파나 해전]]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푸블리우스가 살아나 또 한번 시칠리아로 함대를 끌고 가서 이 인간들을 싹 줄여주면 좋을텐데!"라고 실언했다. 이 발언은 불명예를 얻고 슬픔 속에 죽은 남동생과 친정을 비롯해 해전에서 조국을 위해 싸운 로마군 전체와 노병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실언은 동생이 로마 사회의 질타를 받고 쓸쓸히 죽은 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한 행동이었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거만하고 고집세다’는 이미지가 강한 친정 사람들의 이미지는 이 사건 후 예전보다 더 나빠졌으며, 그녀 역시 다른 귀족 여성들과 달리 두고두고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클로디우스’라는 이름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클로디우스의 원래 이름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다. 이 사람은 위에서 언급된 해군 제독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후손 중 한명으로 전형적인 귀족 엘리트로도 유명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초대형 스캔들인 “보나 데아 성추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 젊은 귀족이었던 그는 카이사르의 아내였던 폼페이아에게 홀딱 반해 BC 62년 12월 최고 제사장 카이사르의 집에서 열린 보나 데아(Bona Dea) 축제[* 굳이 번역하면 ‘선한 여신’이라고 부르는 축제로 오직 여성들만 참석할 수 있던 제사 의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들의 출입은 엄금되었고, 이를 어길 경우 신성 모독죄라는 중죄로 처벌받았다. 따라서 이 제사 의식은 베스타 여사제가 담당했고 최고 제사장인 카이사르조차 출입이 금지됐다.] 때 여장을 하고 출입했다가 신성 모독죄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중죄였기 때문에 처벌을 피하기 불가피했는데, 당시 법무관으로 재판에 참석한 카이사르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 위해 그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시켜주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때 나온 말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아와 이혼하면서 발언한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였다.] 이후 이 사람은 느닷없이 평민만이 출마할 수 있는 호민관 직책을 얻기 위해 스스로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 귀족 신분을 버려 또 다시 주목을 받았다. 평민이 된 그는 이때 클로디우스로 이름을 바꾸고 혼란한 로마에서 자경단을 조직해 민중파의 선동 정치가이자 정치 깡패로 활약했다.[* 클로디우스는 주로 카이사르와 협력했지만, 카이사르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원로원파 정치 깡패인 밀로와의 충돌 끝에 살해당한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위에서 언급됐듯 입양과 복잡한 근친혼, 정략혼으로 율리우스 씨족을 계승했지만, 혈통적으로는 티베리우스 이후부터 사실상 클라우디우스 씨족이며, 가풍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혈통상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리비아,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특유의 가풍을 유지한 까닭 때문이다. 그래서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과 완전히 한몸이 됨에도 루키우스 같은 이름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성씨를 공유하는 등 독특한 특징을 내세웠다.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실체를 구성한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에서 가장 명망 높던 유력 가문 네로,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이었다. 이중 풀케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누명을 쓰고 불명예 속에 몰락귀족이 되고, 그 자리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티베리우스의 네로 가문이 차지하게 된다. *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 장님 아피우스의 직계 후손에서 분파된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은 아니지만, 포에니 전쟁의 영웅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배출한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유력 가문이다. 전쟁 영웅 마르켈루스와 그의 직계 후손들은 대대로 로마 원로원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마르켈루스의 직계 5대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내전기 때 카이사르의 반대파였다. 그러나 그의 사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의 질손녀인 소 옥타비아(아우구스투스의 친누나)와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 3남매 중 아들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인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첫 번째 공식 후계자인 마르켈루스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大 율리아의 첫 번째 남편)였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와는 혈연상으로도 친척이었다. 마르켈루스의 누이들인 대,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또한 [[아그리파]], 안토니우스 가문,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 등 여러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 대상이 되었다. *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로마 황제의 제위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혈통적으로 3명의 황제가 모두 이 가문의 남성'''들이며, '''로마인들에게 “율리우스 가문(카이사르 가문) = 클라우디우스 가문(네로 가문)”으로 인식된 그 가문'''이다. 장님 아피우스(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4남 티베리우스에서 시작됐으며, 그의 직계손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에 이르러 그가 포에니 전쟁의 영웅 중 한명이 되면서 명성을 떨친 분파 가문이다. 하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200년간 집정관을 배출하지 못했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손자 드루수스를 비롯한 네로 가문 남성들은 잘해야 법무관에 머무는 등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첫 번째 남편은 전쟁영웅 가이우스의 손자 드루수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부모 양친이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혈통인 사람이다.]였다. 그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직계손이었고,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 당시 수장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카이사르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탓에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카이사르파에 속한 젊은 귀족 중 한명이기도 했다. 그는 카이사르 밑에서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카이사르군의 해군 제독으로 알렉산드리아 해전을 치뤘으며, 카이사르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갈리아 일대의 로마화 작업 책임자로 파견됐다. 아울러 그는 법무관 재임 무렵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편에 있으면서 한때 옥타비아누스의 주요 정적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티베리우스는 12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이 가문을 이어 받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기 전까지 가문의 수장이었고,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악티움 해전 직전부터 클라우디우스 씨족 전체를 대표하는 분파가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입양되면서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수장 자리를 넘겨줬다.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진지하게 후계자로 고려했고, 집정관 취임과 개선식을 앞두게 되면서 양자 입적이 매우 유력했다. 하지만 그는 정식후계자에 오르기 전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로 요절했다. 그러나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사위였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재혼 당시 뱃속에 있었던 아이인 탓에 그와 자녀들의 혈통은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통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황제)|클라우디우스]], 그리고 그 혈육들이 티베리우스 사후 연이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3대 황제 칼리굴라,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였으며, 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공동제위계승권 내지 차차기 황제로 지명된 남자황족들이나 티베리우스의 손자도 모두 대 드루수스의 혈육들이었다. 참고로 5대 황제 네로는 모후 소 아그리피나를 통해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부터 시작되는 클라우디우스 분파 가문이다. 위에서 언급된 마르켈루스 가문, 네로 가문과 함께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유력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한 집안으로 상술된 두 가문과 비교해도 그 위세가 공화정 시대부터 꾸준히 대단했다. 이런 까닭에 '보나 데아 성추문 사건' 당시 법무관이자 피해자였던 카이사르조차 이 가문의 힘과 자신의 공직 경력 등을 종합적으로 의식해 클로디우스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시켜 줄 정도였다. 장님 아피우스의 장남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가문 남성들이 시조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에서 따온 '아피우스'라는 이름과 로마인들이 장남에게 붙여주는 이름을 대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에서도 본가 격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해군 제독이자 BC 249년도 집정관인 가문의 시조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비롯해 이 사람의 누나로 BC 246년 로마사 전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망언으로 엄청난 벌금을 물었던 클라우디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장인이었던 원로원 최고의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선동 정치가 클로디우스 풀케르(풀비아의 남편) 등이 이 집안 사람들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끊긴 이후에도 로마 역사에서 언급되는 집안이기도 하다.[* 3세기 때의 황제인 [[푸피에누스]]가 모계를 통해 이 가문의 피를 이어 받았고,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이 가문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현대 연구에서 밝혀졌다.] 초대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래 가문으로 그녀의 후손들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모두 이 가문의 피를 물려 받았다. 리비아의 아버지는 원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일원이었다가 리비우스 씨족으로 입양되었던 사람인데, 그는 리비우스 씨족 중 하나인 드루수스 가문에 속했다. 이러한 까닭에 리비아의 차남(칼리굴라의 할아버지)에게 외할아버지의 이름 '드루수스'가 전해졌으며, 다른 아우구스투스 일가 남성들도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와 일찍부터 결혼을 통해 가족관계를 맺었고 이런 인연으로 이 가문의 유력한 세 분파 가문들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지지세력이 됐다. 그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인연은 꾸준히 계속되었는데,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측과 화해하는 과정에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의 딸과 약혼까지 해 대단한 풀케르 가와 인연을 잠시 맺었고, 스크리보니아와 이혼 후 혈통적으로는 풀케르 가 출신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분파 가문들과 모두 친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결혼하면서, 리비아가 전 남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식을 데리고 가지 않았지만 아내의 차남 대 드루수스가 자신의 사저에서 태어난 이후에도 한동안 키웠고 세간의 비난 탓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다가 리비아의 전 남편이 죽자 “내전으로 이들 형제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내의 아들 두 명을 모두 자신의 집에 데려간 뒤 사실상 친아들로 키우고 정을 쏟았다. 이들의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가 되었고, 대 드루수스의 둘째 아들인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4대 황제, 손자인 칼리굴라는 로마의 3대 황제, (외)증손자이자 양손자인 네로는 5대 황제가 되었다. 리비아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출신이었으나, 리비아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리비우스 가문의 양자로서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구성원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를 통해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과도 연결되었고 친조카 마르켈루스를 외동딸 대 율리아와 결혼시켜 후계자를 보려고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둘째 아들 대 드루수스를 누나 소 옥타비아의 딸 소 안토니아와 결혼시켜 자녀 3명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대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지명해 입적시켰고, 그의 막내 아들이 칼리굴라이다. 반면 유일하게 남아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된 대 드루수스의 차남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황제)|클라우디우스 1세]]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의 3남매 중 둘째인 클라우디아 리빌라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다가 다시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양손자인 소 드루수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시켰는데, 소 드루수스와 클라우디아 리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 한명이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